(시심 원고)    
                                            자아초월 심리학의 관점에서 본 거듭남

                                                                                                    
                                                                                                                      글,   김 의 준  장로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창1;27)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전체(우주)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의 작은 우주로서의 본질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주를 경영하시는 큰 틀의 흐름은 소우주인 인간의 의식 발달 과정과 그 궤도軌道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經綸에 따라 인간이 창조되어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전까지, 그리고 그 구원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의 피조물인 인간 경영전략(?)을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초인격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거두巨頭인 켄 윌버(Ken Wilber)가 정의한 인간 의식의
3단계 발달 과정인 주객미분(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주객이분(subject/object consciousness),
그리고 주객초월(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을 위의 각 단계 별 내용과 견주어 살펴 보는 것은 우리
의 신앙 성장의 올바른 경로를 이해하는데 유익할 것으로 본다.

   1. 주객미분의 단계

   먼저 주객이분 의식을 갖게 되기 전의 첫 단계로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의 이분법적 의식을 갖게 되기 전,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상태로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단계(창2;25)를 말한다.
   물론 이 상태의 유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실존적 삶이나 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이
그 상태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륜하시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의식의 첫 단계(실존의 경우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상태)로 볼 수 있다.

   2. 주객이분의 단계

   두번째의 단계인 주객이분의 단계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이후의 단계(창3;23)로서 주객이분 의식은
인간적인 형태의 삶을 가능케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갖게 하고,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욕망과 각종 욕심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온갖 고통과 갈등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외형적인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면도 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인
간이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것이며, 타인의 불행이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최우선시 하는 극한의 이기적 사회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전형적인 하나님 밖의 삶의 형태이며, 여기에는 결국 궁핍과 갈등과 고통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하게 되었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열매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창 2;9), 따라서 이 땅에 생명의 열매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삶의 현장에 교회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였고,
교회가 이 문제의 해결자적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만약 교회가 성경이 제시한 진
리의 방법을 외면하고, 주객이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 이 현상의 치유를 위한 해결
책을 찾는다면, 일시적으로 겉은 그럴싸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점점 빈곤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오늘의 우리 기독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진리는 어두운 창고 안에 감추
어 둔 채, 바로 지금 우리 안에 건설해야 할 하나님나라는 안중에도 없는 듯, 천국과 지옥의 몫 좋은 갈림길에
교회를 짓고,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로 온갖 이분법적인 논리로 불안을 조성하고, 물량적 기복을 앞세워 외형
늘리기와 다듬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실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가?

   3. 주객초월의 단계

   앞에서 말한 주객미분과 주객이분 의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켄 윌버는 주객초월의 방안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객초월의 방법을 성경은 다시 태어나는 특단의 초월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 즉 영적인 거듭남(요3;3)을 통하여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결국 진리
(하나님)를 깨달음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라는 것(요3;32)이다.
   여기서 주객미분과 주객초월을 구분하지 못하여 전초오류(pre/trans fallacy)가 생길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이 장성
했는데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요3;4)"라고 반문한 경우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내보내어 그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 하셨다(창3;23)는 말씀은 주객
이분의 세상을 전제하신 창조로 볼수 있으며, 아울러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객초월, 즉 진리를
깨달아 완전한 자유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고 있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라기 보다
는 "예수를 안다." 더 나아가서 "진리를 깨닫는다."로 이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를 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도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이 장차 그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한 자리 꿰찰 궁리나 했지 예
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 아닌가.
그래서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이 알고 있는 그런 분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보인 언행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의심 많은 자로 비쳐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이제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와 같은 주객이분 속에 갇힌 속화 된 상업적 외침을
멈추고 "예수(진리)를 깨달아 완전한 자유, 즉 평화와 영생을 누리세요."라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할 소명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주객이분의 함정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  끝.